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문단 편집) === 평가의 변화 === 즉, 정리하자면 전쟁에 대해선 독일군 장병들과 국민들, 그리고 장교들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멈추기 위해 총통을 죽여야 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히틀러와 나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조차 히틀러와 [[하인리히 힘러|힘러]]. [[괴벨스]]를 제거한다고 나치 독일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전국민이 단결해서 국가적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판에 암살자들이 국가 혼란을 가중시킬 뻔했다는 것이다. 전후 연합군이 독일 국민들에게 [[탈나치화]] 교육과 노역을 시켰던것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연합군은 독일 국민들에게 [[참교육|폐허가 된 자신들의 도시를 직접 수리하도록 노역]]하면서 이 참혹한 광경이 독일군에 의해 전 유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상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탈(脫) 나치화 영상물, 즉 여러 독일군 [[종군기자]]들이 찍은 얼마 안 되는 국방군과 친위대에 의해 이루어진 학살 장면, 그리고 연합군이 해방시킨 [[다하우#s-2|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참혹함을 보여주며 나치의 [[전쟁범죄]]를 각인시키고 나서야 탈(脫) 나치화를 이룰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와 [[포로]] 및 [[슬라브족|슬라브 민족]] [[대량학살]]을 독일인들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나치 수용소와 그곳의 참혹함을 분명 알고 있었다. 다만 정확한 진행 상황이나 죽음의 행진, 죽음의 열차, 가스 처형 같은 '''상상도 못할 인간 문명을 배신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을 그저 슬라브인이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인 것, 심지어 [[T4 작전|독일인들 중 장애인들까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의 주도 그리고 국방군 고위장교들의 협력 또는 묵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잘 모르고 있었다. 연합국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야 독일인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1960년대까지만 해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인식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냉전]]으로 독일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던 [[서방]]과 [[소련]]이 모두 반(反) [[인륜]] 범죄를 제외하면 나치의 만행을 적당히 덮어 버렸기 때문.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등 반(反) [[인륜]] 범죄에 대해서만 잘못을 인정했을 뿐 나치의 통치 방향 자체는 나쁘지 않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히틀러가 전쟁만 패하지 않고 유대인 및 기타 점령지 주민 학살만 안 했으면 영웅이 됐을 거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다가 [[68운동]] 이후 전쟁 중에 숱하게 죽어나가고 전후에도 젊은 시절을 경제 재건에 바쳐야 했던 다음 세대가 사회 주류가 되면서 제대로 파고들게 됐고 그때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탈(脫) 나치화가 이뤄진 것이다.] 애초에 설령 쿠데타가 성공해서 연합군과 협상을 할려고 시도한들 연합군은 [[하인리히 힘러]]를 체포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그 자신의 착각처럼 협상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 즉시 체포해서 전범 재판에 넘겨서 사형을 내렸을 인물이었다. 이렇듯 정작 독일군은 물론 적국에서조차 평가가 분분했다가 갑자기 이들이 추앙받게 된 것은 [[서독]] 정부가 사실 독일에도 히틀러의 압제에 저항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란 비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독일 내 좌파 언론에서 국방군의 인종 학살 연루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면 반대쪽에서 '''암살자 그룹 영웅화'''로 무마하려는 모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독일 국방군]]이 제거되면서 어떤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암살자 그룹을 영웅화시킨 면도 있다. 이러한 냉전 이후 서독 정부가 겪은 딜레마는 우파 인사들이 국방군 참전용사들을 내세워 주장한 소위 ' 2차 대전은 히틀러와 친위대가 독일 국민을 억압하고 친위대들을 동원하여 점령지를 탄압하였으며 독소전쟁에서도 패한 결정적인 판단들은 전부 히틀러 탓이었다'와 함께 결합하여 국방군의 이미지가 '''전쟁 범죄로 부터 무관하였으며 히틀러와 친위대의 악행에 전쟁 이전 부터 소극적 혹인 적극적인 저항을 펼친 독일 국민의 군대'''라는 널리 퍼진 오늘날 형태의 [[국방군 무오설]]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암살자들이 요즘처럼 확실하게 애국자로 대우받게 된 것은 [[68운동]] 이후의 일로 서독 정부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 운동의 대표적 인물로서 존경받게 되었고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하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중요 5인의 기념비가 베를린의 [[독일 연방군|국방성]] 자리에 세워졌고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거리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어 애국자들을 기리고 있다. 다만 윗 문단에서 언급한 '''저항인물 강조'''에서 아르투어 네베 중장 같은 기회주의적 성격으로 참여한 장교들이 분명 존재했기에 2000년 이후, 즉 [[독일 재통일]]된 이후 동독과 서독이 보유한 나치에 대한 기록 그리고 연합국으로 부터 받은 나치에 대한 기록을 모아 많은 검증된 역사학자들의 토론을 통해 앞서 제기된 비판 사항을 보완하기 위해[* [[에르빈 롬멜]]을 비롯한 여러 국방군 장교들에 대한 재평가, 즉 어쨌든 나치의 부역자다라고 결론내려진 것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노력했으며 아르투어 네베 중장 같은 케이스를 가진 장교들은 기존의 서독 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암살 작전 애국자 목록에서 삭제하고 나치 부역자이자 전범으로 명시하였다. 현 독일 정부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히틀러]] 그리고 [[나치즘|국가사회주의]]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슈타우펜베르크와 중요 5인, 그리고 선별적으로 반나치, 반히틀러, 반전 사상을 가짅 것이 확인된 인물들에 한해서만''' 영웅으로 추앙 중이다. 매년 독일 연방군 입대식이 슈타우펜베르크 거리에서 이루어지면서 그를 비롯한 나치에 저항하고자 했던 장교들의 정신을 이어받을 것을 선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7월 20일이 되면 추모식도 매년 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